名將 최영 장군 묘소를 찾아서
<백영웅의 찾아서 시리즈>
名將 최영 장군 묘소를 찾아서
오늘은 부근에 노랑망태버섯이 서식한다는 얘기도 있어서 예전부터 촬영을 다니
면서 생각은 있었으나 지나 치기가 일수였던 중학시절 역사 선생님으로부터 국사시
간에 고려 공민왕에서 말기의 역사와 최 영 장군의 얘기를 구수한 어조로 듣던 청소
년시절을 떠 올리며 왼쪽 계곡의 물소리를 들어 가면서 고즈넉한 2km 숲 길을 걸어
묘소가 있는 돌계단앞에 다달았다. 잠시 묵념을 드리고 돌계단을 오른다.
최 영(崔瑩) 장군은 1316년~1388년 고려 말기의 명장이다. 유교 사대부와 손을
잡은 이성계와 대립하다가 위화도 회군 이후 권력에서 밀려난 후 귀양지인 고양에서
충주로 옮겨졌다가 다시 개경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그해 12월 순군옥에서 죽임을 당
했다. 본디 청렴하기로 소문난 최영 장군은 죽기 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내가 지금 것 살아오는 동안에 단 한 번이라도 부정한 짓을 저질렀다면 내 무덤 에서
풀이 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결코 풀이 돋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무덤은 유언대로 정말 풀이 나지 않았다가 이후 억울함이 풀렸는지
1976년부터는 무덤에서 풀이 조금씩 나기 시작 했다고 한다. 지금도 무덤에는 적토가
보이고 아직도 풀이 그다지 많지가 않다.
최 영 장군과 비록 정적관계였던 이성계도 그를 죽였지만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생각
하고 새 왕조를 세운 6년 후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려 최영 장군의 넋을 위로하
였다.
2009년 7월 19일
들꽃산꽃山人/ 白英雄(Simon)
최 영 장군 묘 (崔瑩將軍墓) 안내문
묘소로 올라가는 입구 돌계단
돌계단을 20여 미터 정도 오르면 묘소가 나온다.
돌계단이 끝나는 최영 장군 묘소 앞
코 부분이 손상된 문인석과 충혼비
코 부분 파손을 보면 오래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웬 놈이 천벌을 받을라고 했을까.
무민공(武愍公) 충혼비와 문인석(오른 쪽 귀부분이 깨져있음),
적묘로 유명했으나 1976년부터 풀이 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부인 문화유씨와 합장
하여 1기 묘로 만들어 있고 2단호석 두른 사각형 묘로서 좌우에는 충혼비가 있다.
최 영 장군 뒤쪽의 묘소는 부친인 최원직의 묘이다. 여늬 옛 역사의 장군 묘역과는
너무 큰 차이가 고즈넉해 보였다.
오래된 충혼비가 지난 역사를 말해주는 것 같다. 장군 묘소 좌측에 세워진 비석에는
高麗盡忠奮佐命安社功臣判密直事大將軍門下侍中(고려진충분좌명안사공신판밀직사
대장군문하시중) 贊成事六道都巡察使鐵元府院君謚武愍東州崔公諱 瑩之墓(찬성사육
도도순찰사철원부원군익무민동주최공휘영지묘) 三韓國大夫人文化柳氏?左(삼한국대
부인 문화유씨부좌) 라고 씌여 있다.
武愍公 최 영 장군 충혼비
●소재지: 경기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 70 - 2. 경기 기념 제 23호 |
부인 문화유씨와 합장하여 1기의 묘로 만들었다. 사각형의 2단 호석을 두른 사각
형 묘로서 곡장(曲墻)을 설치하였다. 묘 앞에는 좌우에 묘비와 충혼비가 있으며
상석, 혼유석, 향로석이 있고 망주석과 문석인 각 한 쌍이 좌우에 배열되어 있다.
봉분은 사각이며 위편에 최영의 부친 최원직의 묘가 있다.
●가는 곳: 구파발에서 통일로를 따라 파주 쪽으로 올라가면 교외선을 지나 오른
쪽으로 필립핀군 참전기념비가 나오고, 그 옆에 ‘최영(崔塋)장군 묘 입구’라는
표석이 서 있는데 표석 좌측 도로를 따라 가다가 오른 쪽 길로 들어가면 대자리
마을이 있고 신설된 주차장에서 산 기슭으로 다시 3~400m 도보로 올라가면 왼 쪽
작은 연못이 있고 오른 쪽에 안내판이 서있으며 돌계단을 20여 미터 오르면 무민
공 최 영 장군의 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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